원수공 이억(李山+疑)의 자는 신지(信之)이고, 호는 퇴은(退隱)이니 우계이씨 세계(世系)상 8세이다. 그의 부친은 밀직대부로 추봉 중추원사에 추봉된 사성(思成)이고, 조부는 영동정 백경(伯卿,1290~?)이며, 증조부는 예빈시경 구(球,1265~?)이다. 모친 영양남씨는 요동지휘사(遼東指揮使) 성로(星老)의 따님이며, 의령군 남군보(南君輔)의 현손이었다. 고려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유장(儒將)으로 강계원수에 재임 중, 1388년(우왕 14) 4월 요동정벌군이 편성되어 최영(崔瑩)이 총도통사, 조민수(曺敏修)는 좌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가 우군도통사로 임명되자,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부관으로 출정하였다. 그해 5월 위화도에 이르러, 이성원수 홍인계(洪仁桂)와 함께 선봉으로 요동에 쳐들어가 적군을 격파, 다수 참살하고 전리품을 탈취하여 돌아오자, 우왕이 기뻐하며 그 용맹을 가상히 여겨 그로부터 금정아(金頂兒)와 무늬 있는 비단을 하사받았다. 그후 1392년 6월에 김을귀(金乙貴) 등과 함께 밀직부사에 임명되었으며, 7월 이성계가 재차 요동정벌을 하였으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자 그는 벼슬을 버렸다. 조선을 건국한 이태조는 삼고의 예로써 가정대부 중추원부사 도평의사사사 겸 의흥친군위동절제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 하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낙향하여 순흥의 소백산으로 퇴거하였다. 이태조는 여러차례 소명하였으나 불취하니, 교지를 내렸는데, 내 장수로 있을 때 휘하의 장수 중 이억은 어렵고 위태로움을 피하지 아니하였으니, 나의 오늘이 있음은 그대의 공이 크지 않음이 없도다. 하며 원종공신 1등관에 녹훈하고 전답과 노비를 내려주었으니, 왕조실록에 기록되었다.
또한, 각지에서 공물이 올라왔으나 이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그로부터 쌓여서 구두들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소백산 정상에 올라 통곡하며, 선왕을 경조하는 4배를 드렸다고 하니, 그때부터 산 정상을 국망봉(國望峰)이라 이름 붙여졌다.
후에 조정에서는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가정대부 중추원부사 도평의사사사 겸 의흥친군위동절제사를 추서하였다. 묘갈명은 7대손 감(戡)이 찬하였다.
이유(李愉) 태종14년 식년시에 입격한 이사맹(李師孟)의 부(父) 이유(李愉) 세종1년 식년시에 입격한 이사증(李師曾)의 부(父) 이유(李愉) 세종14년 식년시에 입격한 이사계(李師季)의 부(父) 이유(李愉) 연산군10년 식년시에 입격한 이번(李蕃)의 증조부(曾祖父) 이상은 디지털 한국학 홈페이지에서 찾은 기록.
이유(李愉) 조선 개국공신 하륜(河崙)의 천거로 사헌부 지평이 된 후 우부승지를 거쳐 직제학을 역임했다. 태종 때는 대호군으로 여진을 정벌하고 상주목사, 형조와 이조찬판을 지내고 사은사가 되어 수차에 걸쳐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9년(세종1) 동북면의 여진족 침입에 잦아지자 함길도 도관찰사로 나가 큰 공을 세우고 세종 5년에 별세했다. 덕산이씨 Surname에서 찾은 자료
李師孟 1396년~? 문신 자는 학이, 호는 죽선, 본관은 덕산, 여조의 집협전대제학 사목의 증손이며, 관찰사 유의 아들이다. 1411년(태종 11)에 생원에 입격한후, 태종 14년 식년문과의 을과에 급제하여, 여러벼슬을 거쳐 지사 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병조참판에 이르렀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칠곡군 동명면 금암리 태봉하에 공의 신도비가 소재하니, 안동인 권중한이 비문을 지었다. 태봉중턱에 제단이 있다. 참고문헌 : 국조방복(國朝榜目), 거주지( 州誌), 칠곡지(漆谷誌), 담당부서 : 기획감사실 문화공보담당 권중환찬신도비명(權重煥撰神道碑銘)
李愉 조선초기 문신, 호는 은재, 본관은 덕산, 대제학, 사목의 손으로, 승지, 참판, 관찰사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동명면 금암리의 태봉산에 신도비와 제단이 있다. 참고문헌 : 거주지( 州誌), 칠곡지(漆谷誌), 한국인의 족보 담당부서 : 기획감사실 문화공보담당 [ 이전으로 ]
李師季 태종조~? 문신, 자는 미상, 본관은 덕산, 참판 사맹의 아우이다. 1432년(세종 14)에 생원에 입격한 후 이해, 4월 14일에 시행한 식년문과의 병과로 급제한후 여러 벼슬을 거쳐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 국조방복(國朝榜目), 경산지(京山志), 거주지( 州誌), 칠곡지(漆谷誌) 담당부서 : 기획감사실 문화공보담당 [ 이전으로 ] 칠곡군청 홈페이지에서 찾은 자료.
따라서, 안영부의 사위 朴? 는 찾지 못하였으나, 사위 덕산이씨 이유(李楡)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선조 원수공 이억에 대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참판 이유, 지사 이사맹, 첨지사 이사증, 참판 이사계 4부자분은 조선 초기의 인물들로, 참판 이유는 고려 말기와 조선 태종때까지 활약하던 인물이니, 동서되는 이억과 같은 시대에 생존한 인물이다. 같은 시대를 살았으니, 이 또한 근거가 된다. 또한 지사 이사맹, 첨지사 이사증, 참판 이사계 삼형제분은 조선 태종때의 인물이시며, 그 중 막내되시는 참판 이사계가 세종때의 인물이시니, 그 이종사촌이 되는 우리선조 판중추부사 만(蔓), 직장 원길(原吉) 형제와 거의 연배가 비슷하다. 다만 판중추부사 만은 고려조에 무과에 등제하여 합문지후, 인진사, 홍로부사 등을 역임하시고 장모 서원염씨께서 별세할 당시에는 중추원부사와 사재감을 역임하였으며, 조선건국 후, 벼슬이 강등되어 봉렬대부 호분위경력으로 별세하셨으니(아마도 묘표가 세워진 1428년으로부터 3년전으로 생각된다.), 이종사촌 덕산이씨 삼형제분 보다는 다소 먼저 태어나셨던 것이다.
따라서 안영부 공에게는 박?, 이유에게 출가한 두 따님 외에 이억에게 출가한 따님이 한분 더 계셨으나, 어떤 일이 있었는가는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기록에는 실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 혹시 끝까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시다가 이성계나 이방원에게 나쁘게 보였던 것은 아닌지도 모를일입죠. -[02/09-15:01]-